한국예술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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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대표작가

2009-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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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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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9

세잔Paul Cezanne (1839 ∼ 1906) 프랑스의 화가.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출생.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린 시절 친구 E.졸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59년 아버지의 권유로 엑상프로방스의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61년 그만두고 졸라의 권유로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로 학교를 옮겼다. 여기에서 C.피사로, A.기요맹 등을 알게 되고, 후에 인상파화가들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한때 미술학교 시험에 실패하여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72년 퐁투아즈에서 헤어졌던 피사로와 만나 다시 그림에 전념하기 시작하고 인상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단지 반관전(反官展)이라는 입장에서 동조하는 정도였으며, 학풍에서는 C.모네나 피사로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한 외광파(外光派)에 속하지는 않았다. 74년 제1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작품에서 보여준 빛과 색의 배합은 한층 인상파작가로 접근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나 제3회 인상파전을 고비로 차차 인상파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작풍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96년 인상파그룹과 결별하고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돌아와서는 작품에만 몰두하였으며 4년 후인 1900년경부터는 재능과 독특한 작풍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연은 구형 ·원통형 ·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견해를 밝힐 만큼,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큐비즘(cubisme)은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을 구분하면 《에스타크》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등은 원숙기의 작품이며 《목욕하는 여인들》 《생트빅투아르산》 등이 대표적인 후기작품들이다. 그 밖에 정물에 관한 그림과 초상화에도 많은 걸작을 남겼다 목욕하는 여인들 세잔의 수채화에는 유화를 습작과 유화에서 독립되어 있는 작품들이 있는데 이 작품은 그 후자에 속한다. 수채화는 세잔에 있어서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며, 만년에 이를수록 수채화는 유화와 대등한 질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데상에 있어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세잔의 화법은 쿠르베나 밀레, 모네, 피사로보다도 그 폭이 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몇 사람의 여인들이 풀밭 위에 자유롭게 배치 돼 있고, 중앙의 한 여인은 물에서 올라오고 있다. 왼쪽에는 화면을 이어 붙인 자국이 있고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인체와 수목이 더 그려져 있어 몇 번이고 고쳐 그어진 윤곽선의 움직임이 보다 아름다운 리듬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이것이 더욱 적절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인상파의 수업을 시작했을 때의 세잔은 색의 조화를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몇 번이고 캔버스에 물감을 덧칠 했고, 자연히 그림에 칠해진 물감은 두꺼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기술에 숙련된 40대의 세잔은 가는 필촉을 정리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고, 작품에 보이는 물감의 두께 또한 엷게 마무리 되었다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관계 사이의 화음을 포착하는 것이다' 라고 한 세잔느의 말처럼 사물 하나하나의 정밀성보다는 구성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첫눈에 그저 자연스럽고 우연하게 놓여진 듯이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작가의 의도가 사물 개개의 위치를 세심하게 조정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드가 (Hilaire-Germain-Edgar Degas,1834-1917) 1834년 7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J.A.D.앵그르의 제자 L.라모트에게 사사(師事)했고, 앵그르로부터도 직접 가르침을 받아, 평생토록 이 고전파의 거장에 대한 경의를 품게 되었다. 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하였다. 이 무렵부터 거의 10년간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기로 오로지 고전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제를 찾게 되자 더욱 재능을 발휘하여 정확한 소묘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인물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왔다. 경마나 무희,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이러한 그의 눈과 기량은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선천적으로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 그의 인간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여 고독한 가운데 파리에서 83년의 생애를 마쳤다. ● 무용 수업을 받고 있는 장면 빠 드 트르와(세 사람이 함께 추는 춤)를 연습하는 정경을 그린 이 작품 역시 벽과 바닥의 공간 대비가 큰 차를 보인다. 화면의 왼편 상단부에는 세 사람의 무희가 몸의 균형을 잡으려 하고 있거나 준비 자세에 임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지도 선생인듯한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의 옆머리는 괴이하리만치 길쭉하게 보인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오른편의 무희는 곧 이어 배우게 될 무용 자세를 홀로 연습하고 있으며, 화면의 전경(前景)에는 어느 부인이 신문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어느 무희의 보호자인 듯한 이 여인의 무관심한 모습이 무용에 열중하는 다른 인물들과는 상반된 느낌을 갖게 한다. 가까이 그 리고 위에서 내려다본 듯한 시각 위치에서 포착한 구도가 특이하다. ●무용 시험 파스텔의 유연한 질감과 화려한 색채를 알맞게 표현한 이 작품은 인물의 특징, 파악의 방법이 자못 날카로움을 보인다 예의 작품들과는 달리 화면을 가득 메운 군사의 무희들이 자신의 발 동작을 살펴보는 모습이거나, 긴 양말을 고쳐 신은 모습이며, 보호자인 듯한 여인이 이를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드가는 이 작품에서 인체의 동세,그리고 신체의 각 부분의 특징을 강조하여 날카로운 선묘를 구사하고 있다. 사각(斜角)을 이루는 지면의 불안정한 느낌을 보완키 위해 수직으로 곧 추선 인물을 두어 대각(對角)을 이루게 하며, 그 결과 V자 모양의 구도를 이룬다. 시험의 차례를 기다리며 준비중인 무희들의 새하얀 의상은 유연한 여체의 탄력을 뒷바침이나 하듯 유난히도 밝게 빛나 보인다. 고갱 Gauguin, (Eugène-Henri-) Paul 1848~1903 세잔느, 고흐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폴 고갱(Paul Gauguin : 1848-1903)은 유럽을 떠나 타히티 섬으로 가서 그 곳의 원주민을 그렸던 화가이다. 고갱은 유럽의 미술이 겉멋에 빠져 피상적으로 되어가는 위험에 빠져 있으며, 인간의 감성과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빼앗아 버렸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야만적인 색채와 소묘만이 타히티의 때묻지 않은 자연의 아이들을 올바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고갱은 원주민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토착민 장인들의 수법을 연구하고 때로 는 자신의 작품 속에 그들의 것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가 그린 원주민의 초상을 원시적인 미술과 조화시키려 애썼다. 그래서 그는 형태의 윤곽을 단순화하고 넓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했다 자화상 아를르에서 고호를 떠나 1889년 4월에 세번째로 퐁 다벵으로 갔다가, 10월에 루 뿌르두로 가서 하숙집 식당의 찬장 위쪽 거울 판에 이 그림을 그렸다. 반대쪽에는 친구 마이엘 데 팜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사과와 뱀, 머리 위의 노랑빛 관 등을 추측하면고갱이 여기에서 자기를 구세주(救世主)로 견주어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 하다. 배경의 강한 빨강과 앞쪽의 강한 노랑으로 화면을 이등분하여 상태티즘(synthetisme)의 지도자상으로 부각하여 평면적으로 밀어버렸다. 그러나 밝고 빛나는 색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주는 인상은 어둡고 시니크한 괴로움이 감돌고 있는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동료들 속에서 이 야만인의 고독을 방영하고 있는 것이리라. 바로 직후에 타히티의 원시림(原始林)에 자기를 던져, 그 야성을 불태울 거친 이지(理智)의 힘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언제 결혼하니? 타히티에서 그린 고갱의 작품에는 재미있는 제목이 많다. <언제 결혼하니?>. <어마, 질투하고 있니?>, <왜, 골이 나 있니> 등, 그외에도 대화의 단편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것이 많다. 일체의 인공적(人工的)인 여벌문화가 없는 타히티의 생활에는 그 일상의 한 장면 장면이 상징적인 의미성(意味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92년 7월에 그는 부인 메트에게 '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소. 지금에 와서야 이 토지와 그 향기를 알게 되었소, 나는 타히티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수수께끼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긴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마오리족 (族), 바로 그것이오.. 이런 것을 알기 위하여 나는 일 년이 걸려 버렸소.'라고 쓰고 있다. 그러한 그의 이해가 이 그림 속에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두여인의 동 (動)과 정(靜)의 자세의 대조(對照)에 하반신(下半身)이 겹쳐 있는 그 미묘한 뉘앙스가 인상적이다. 에두와르 마네[Edouard Manet] 연 도 : 1832-1883. 프랑스 파리 출생의 화가로 인상주의의 개척자로 불린다. 유복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엔 아버지의 반대로 견습선원으로 있다가 1850년 겨우 퀴튀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교습에 반발하고 루브르 박물관의 고전회화를 모사하면서 할스나 벨라스케스 등 네덜란드 화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 후 살롱에 여러 번 출품했으나 그의 작품은 이미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확립한 후여서 그 시대에 비해 대단히 이색적이며 혁신적인 작품으로 여러 차례 낙선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의 등의 작품이 살롱에서 비난을 받으며 오히려 세간의 주목을 끌어 그의 표현기법이 오히려 신선하고, 참신한 이미지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후 피사로, 모네 , 시슬레 등 청년화가들 사이에서 후에 인상주의의 길을 여는데 기둥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미즘의 공인을 기다리며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다. 세련된 도회적 감각의 소유자로 이전의 어두운 화면에 밝음과 활기 있는 현실성을 예민하게 포착 함으로서 전통과 혁신을 연결하는 중개 역할을 훌륭히 한 전래 없는 화가였다. ◀ 작품보기 ▶ 피리 부는 소년 손과 발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실재감)을 표출시킨, 마네의 재주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대표작의 하나, 검정, 빨강 등 몇 개 안 되는 색면이 각기 다른 음(음)을 내는 듯한, 이른바 음악적 효과를 겨냥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배면(배면)처리도 원근법이나 수평 감각(수평감각)을 배제, 종이를 바른 듯 '없어진 배경'인 이러한 단순함이 오히려 실재감을 강조한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대상을 이와 같은 '공기로 감싸는' 수법은 그가 1865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 벨라스케즈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는 사실이 마네의 편지에서 밝혀졌다. 생 라자르驛 파리 시내를 철마(鐵馬)가 달리던 1830년 대 말, 철도를 둘러싼 여러 정경들이 새 시대를 알리는 풍속으로, 도미에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모티브로 채택됐다. 방금 철책 너머로 연기를 남긴 채 사라진 기차를, 곱게 차려 입은 소녀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그 옆에 어머니로 보이는 책을 든 부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소녀의 목 언저리와 부인의 얼굴이 감미로운 해조를 이루고, 소녀의 흰색에 가까운 회색 옷과 부인의 검은 옷이 대조되면서 상이한 마음속의 이야기를 읽게 하고 있다. 마네는 이 회화 언어로 이별을 그린 모양이다. 구시대와 새 시대의 이별을- 이 작품이 <철도에서>라는 제목으로 1874년의 살롱에 출품되자 찬반 양론으로 갈려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모네 (Claude Monet 1840∼1926) 프랑스 인상파의 대표적 화가. 파리 출생. 처음에는 마을 명사들을 그린 캐리커처로 호평을 받았으나 풍경화가 E. 부댕을 만나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는 부댕으로부터 유화를 배우면서 <옥외에서 풍경이나 바다경치를 그리라>는 말을 들은 후에는 풍경화가 그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1859년 파리로 나가, 1862∼1864년 C. 글레르의 아틀리에에 다녔다, 이때 F. 바지유·A. 시슬레·P.A.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과 알게되어, 4사람은 때때로 퐁텐블로 숲에서 작업을 함께 했다. 1862년에는 르아브르 근처에서 네덜란드 풍경화가 J.B. 용킨트를 만나 물과 대기와 빛의 묘사에 크게 감화되었다. 1865년 살롱에서 2점의 바다풍경화가 입선되고, 1866년의 살롱에서도 2점의 작품이 입선되었다. 그는 점점 빛의 효과나 물의 반영에 민감해졌고 색조도 1860년대 말에는 한층 밝아졌다. 1871년 프랑스에 돌아와 파리 교외 센강변의 행락지 아르장퇴유에 거처를 정하고, 차츰 근대화·공업화 물결을 타고 있던 이 지방의 여러 정경을 그렸다. 그는 자연을 그 변화상에 따라 그리려고 때로는 아틀리에용으로 마련한 배를 센강에 띄우기도 했다. 1874년에는 C. 피사로 등과 함께 살롱에 대항하여 독자적 그룹전을 조직하였는데 여기에 출품한 작품의 하나인 《인상-해돋이》는 뒤에 인상파라는 호칭을 낳는다. 그는 <여러 색채는 바라보게 되었을 때 단일체로 합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890년대에는 여행을 그만두고, 같은 모티프를 다루면서 시간의 추이에 따라 방법을 달리하며 그리는 연작에 착수하여 《짚더미(1890∼9l)》 《포플러(1891)》 《루앙대성당(1852∼94)》 등의 시리즈를 냈다. 루앙의 대성당 시리즈에서 건물은 그 자체가 연구대상이라기 보다는 회화적 탐색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있을 뿐이다. 모네는 암석으로 된 대성당 정면을 묘사하기 위해 표면을 물감으로 거칠게 바른 한편, 그 위에 잡힌 빛과 어른거리는 햇살의 효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성당 연작은 그림을 통해 순간성을 전달하고자 하는 모네의 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대기의 변화를 읽는 그의 감각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음을 알려준다. 노적가리나 포플러와 달리 대성당화의 모티브는 항상 동일하며, 대체로 같은 각도에서 관찰되고 있다. 따라서 빛의 조건이 달라짐에 따라 변화하는 형상의모습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된 작품으로, 이 작품은 "인상파"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보고 '르 샤리바리'지의 평론가 루이 르누아가 모네와 르누아르, 드가, 모리조를 새로운 인상파 화가라고 평했고 여기에서 "인상파"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일출의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린 그림이다. 일출의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순간적인 포착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따라서 사진처럼 세세하게 묘사할 수가 없다. 모네는 아름다운 일출 광경을 묘사하려 했다기 보다는, 일출 광경의 감흥적인 인상을 기록하려 했다. 모네는 일출 순간의 태양빛과 바다빛, 기후에 따른 순간적인 색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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